오늘,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10/22)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다.

엄마가 어디선가 받은 샤워타월을 가서 쓰고 버리라고 챙겨줬는데, 샤워를 하려고 포장을 뜯고 타월을 물에 적시다 보니 라벨에 적힌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일회용품 주제에 재질도 꽤나 고급스러워서 제조국이라도 써 있을까 해서 살펴보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는 이런 구석진 곳에서 발견되는 글들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놓칠 수 없었다.

SOMETIMES A SMALL CHANGE
IN YOUR DAILY LIFE
MAY TURN INTO
SOMETHING SPECIAL
THAT YOU'VE NEVER EXPECTED.
가끔은 당신 일상 속
사소한 변화가
당신이 전혀 예상치 못한
특별한 무언가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런 글이 샤워타월 귀퉁이 라벨에 실린 의도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샤워타월을 바꾸는 사소한 변화가 우리 일상을 특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기엔 샤워타월을 새로 바꾸는 변화는 너무 뜬금없을 뿐더러 애시당초 이 샤워타월은 증정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아마 아닐 듯 싶다. 아무래도 브랜드 이미지에 맞는 짧은 감성적인 글을 수록함으로서 샤워타월에서조차도 세련됨을 고수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폰트에서부터 느껴지는 간결함과 심플함이 이런 해석에 대해 설득력을 한층 더 더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세련된 이미지메이킹과는 별개로 나는 이 문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변화가 특별함을 만든다. 다르게 말하면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도 전혀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대체로 많은 노력을 들여야, 다시 말해 큰 변화를 일으켜야 특별한 결과가 나오고, 적은 노력을 들이면 그만큼 평범한 결과가 나온다고 여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가 '노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례인 시험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 매번 열심히 공부를 하고도 참신하고 어이없는 사유로 시험을 망치는 친구들을 수도 없이 본다. 반면에, 샤워타월 라벨의 글처럼 정말 사소한 변화, 예컨대 샤프를 바꾼다든지, 문제 푸는 순서를 바꾼다는 등의 변화로도 성적이 올라가는 친구도 있다.
일반론에서 벗어나 현실의 사례를 고려하면 변화와 결과 간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나무에서 열리는 빨갛고 아삭한 과일과, 한국어 단어 '사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연결되었듯이, 우리가 변화를 위해 들이는 노력과 그 결과는 대체로 비례하지 않는다. 관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노력과 결과 간에 산점도를 그려본다면 그 관계성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변의 시험을 망친 사람들에게 "국영수는 운이다." 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전국의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봐야 200여명 남짓한 학생들과의 내신을 경쟁하는 것이기에, 각 학생들 간의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을 수밖에 없고(국영수로 한정하는 이유는 탐구나 제2외국어 등의 과목은 학생들 간의 실력 차가 유의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나를 차별화하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되는 직감, 혹은 통찰력, 쉽게 말해 운이기 때문이다. 단지 너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책임한 조언이며, 그다지 다정한 위로의 말도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너의 노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라는 마음을 품고 이런 말을 한다.
결국 이 샤워타월은 우리에게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인생 속 디테일이 큰 변화를 일으킨다, 노력과 결과는 별개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특별함은 결국 행운의 일환이다... 물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이 짧은 문구에 대해서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개의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꼬여 있는 나에게는 이 글이 우리 주변의 사소하지 않은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나는 앞선 '사소한 변화' 에서 비롯되는 온갖 특별함의 수혜자라고 느끼기에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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