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확장자는 무엇일까

시계태엽 ㅣ 2025. 2. 15. 04:49

그런 기억들이 있다. 잊히지 않는 기억들 말이다. 나의 경우에는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핑크색 장난감 카트를 타다가 엎어져서 우는 아이를 본 기억이 그러하다. 그때 내가 네 살이었는지 다섯 살이었는지, 무슨 마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핑크색 카트' 와 '울음' 따위의 키워드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의 기억이라는 폴더에 저장된 기억들에는 우리가 겪었거나 생각한 내용, 본 것, 들은 것 등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는 간혹 우리를 그때 그 순간의 기분, 감흥, 분위기로 돌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 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형식으로 저장되어 우리를 다시 그 순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일까.

 

'기억되는 형식' 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파일 확장자 개념을 빌려와보자. 예를 들어 내가 겪은 내용은 .txt 형식으로 저장될 것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게스트하우스에 놀러 갔다.' 라는 내용은 문자로 나의 기억에 남는다. 반면에 그곳에서 내가 본 게스트하우스 아래 층의 어둡고 고요한 공장의 이미지는 .png, 혹은 .jpg 형식으로 저장되리라 생각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들은 것은 .mp3로, 여타 다른 감각의 경험들도 정량화하여(실제 어떤 방식으로 냄새나 맛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종의 형식으로 저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끔씩 기억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그때의 기분과 감정과 감흥과 분위기는 어떤 형식으로 저장되는 걸까?

 

내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느껴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던 여름방학의 어느 날 방과후 수업을 들으러 아침 일찍 아파트 단지를 뛰쳐나가던 그 순간의 기분, 잼민코믹스 회의를 하겠답시고 전화를 받고 봄방학의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종윤이 집으로 가던 그 순간의 감정, 아무도 없는 큰 회의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다빈치 코드를 하고 가끔 믹스커피가 곁들여지던 그 순간의 감흥, 강남 어느 소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의 그 쌀쌀하던 순간의 분위기는 어떤 기전으로 나에게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걸까.

 

그냥 수업 중에 칠판을 바라보며 옛날을 떠올리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앞서 설명한 .txt나 .jpg, .mp3와 같은 형식의 기억들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분이 저장된 것이 아니라 그런 기분을 실행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느낌이랄까. 이런 관점에서 감정과 감흥과 분위기의 확장자는 .exe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기분' 이 언제나 실행되지는 않는 것을 보면 그 핵심은 역시 그리움이 아닌가 싶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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