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의 즐거움에 대하여

시계태엽 ㅣ 2025. 4. 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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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을 안 한지 꽤 되었다. 게임이건 프로그램이건, 개발에서 손을 뗀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23년 겨울방학부터 여름방학까지 달린 주민서버 시즌 5 개발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올해 우리 학교 컴퓨터부 부장을 맡게 되면서 파이썬을 비롯해 프로그래밍 관련해서 깔짝일 만한 일은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낸 것은 없다는 뜻이다.

황새오래걷기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오늘(정확히는 어제) 학교에서 두 교시 연달아 디벗을 사용했다. 생명과학 시간에 탐구보고서를 작성하다 시간도 많이 남은 김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임 황새오래걷기를 했다.

 
황새오래걷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키를 한 번 누를 때마다 기울어지는 폭이 증가한다. 물리학 I을 들으며 지겹게 배운 등속 운동과 등가속도 운동이 떠올랐다. 황새의 회전에 대한 가속도는 아마 고정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속도는 대략 일정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대충 왼쪽과 오른쪽 방향키 누를 때마다 회전 방향을 바꿔주고 반복문 안에서 엔트리봇이 걷는 모션을 추가한 뒤 속도에 +만 일정하게 해 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갑자기 이걸 엔트리로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몰래 개발

다음 교시는 영어였다. 운 좋게도 영어 역시 디벗을 사용했다. 구글 클래스룸에서 워크시트를 열심히 작성하는 척을 하며 엔트리를 켜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시작 버튼을 누른 뒤 좌우 방향키를 눌러 의도한 만큼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 수업이 끝났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수치적인 부분과 배경 이동을 통한 걷기 표현 등을 수정하고 내가 원하는 바가 구현된 것을 확인한 뒤에는 디벗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자랑하러 다녔다.
https://naver.me/GYCBz3MC

작품 - 주민이의 황새오래걷기 : 엔트리

소프트웨어를 통해 미래를 꿈꾸고 함께 성장합니다.

playentry.org

 

변수명은 가속도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물리학적으로는 속도가 맞다. 가속도만큼 속도를 나타내는 변수에 더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가속도는 코드 내에 상수로 따로 존재한다.

엔트리봇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했고, UI는 내장 변수들이 다 드러나 허접하기 그지없으며, 두 이미지를 연달아 보여주는 배경의 접합부는 끊겨 있는 게임을 도합 20분 만에 완성하며 나는 오랜만에 짜릿함을 느꼈다. 개발의 짜릿함을 말이다.
 
그 짜릿함을 나누기 위해 나는 부계에 내가 만든 황새오래걷기와 그 후에 만든 터치로 작동하는 모바일 버전의 링크를 공유했다. 내가 느낀 기분이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플레이를 해 본 많은 사람들은 꽤나 즐거워했다. 나는 이 정도면 값진 수확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허접하더라도 말이다.

완벽주의의 함정

나는 어릴 때 엔트리로 뭔가 멋지고 대단한 것을 만드려다 실패한 적이 많았다. 게임을 만들고 싶어지면 일단 이비스 페인트 X든 파워포인트든 켜서 배경과 캐릭터부터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비주얼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려다 보니 정작 코딩을 할 땐 힘이 다 빠져서 중간에 포기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김예준이 만든 예준이의 똥 피하기 게임을 보게 되었다. 이 5분 만에 만든 것 같은 허접하고 재미있는 게임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만화는 꼭 A4용지로 제본해서 만든 책에 색연필로 색칠을 해야만 만들 수 있던 걸로 알고 있던 때의 김예준의 마구 휘갈긴 만화를 봤을 때의 충격이었다. 퀄리티와 재미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아무거나 만들다 보니 엔트리를 좀 더 즐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트리는 내 기억에서 멀어지고 파이썬과 C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말이다.

개발의 즐거움

어찌 되었건, 오랜만에 개발과 구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날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엔트리로 이런 헛짓거리들을 하다 보면 여름방학 직후에 있을 학교 축제 부스를 위한 컴퓨터부 조별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리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분명 재미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