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
개발을 안 한지 꽤 되었다. 게임이건 프로그램이건, 개발에서 손을 뗀 지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23년 겨울방학부터 여름방학까지 달린 주민서버 시즌 5 개발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올해 우리 학교 컴퓨터부 부장을 맡게 되면서 파이썬을 비롯해 프로그래밍 관련해서 깔짝일 만한 일은 많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결과물을 낸 것은 없다는 뜻이다.
황새오래걷기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오늘(정확히는 어제) 학교에서 두 교시 연달아 디벗을 사용했다. 생명과학 시간에 탐구보고서를 작성하다 시간도 많이 남은 김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임 황새오래걷기를 했다.

황새오래걷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키를 한 번 누를 때마다 기울어지는 폭이 증가한다. 물리학 I을 들으며 지겹게 배운 등속 운동과 등가속도 운동이 떠올랐다. 황새의 회전에 대한 가속도는 아마 고정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속도는 대략 일정하게 증가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대충 왼쪽과 오른쪽 방향키 누를 때마다 회전 방향을 바꿔주고 반복문 안에서 엔트리봇이 걷는 모션을 추가한 뒤 속도에 +만 일정하게 해 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갑자기 이걸 엔트리로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몰래 개발
다음 교시는 영어였다. 운 좋게도 영어 역시 디벗을 사용했다. 구글 클래스룸에서 워크시트를 열심히 작성하는 척을 하며 엔트리를 켜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시작 버튼을 누른 뒤 좌우 방향키를 눌러 의도한 만큼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자 수업이 끝났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수치적인 부분과 배경 이동을 통한 걷기 표현 등을 수정하고 내가 원하는 바가 구현된 것을 확인한 뒤에는 디벗을 들고 이곳저곳으로 자랑하러 다녔다.
https://naver.me/GYCBz3MC
작품 - 주민이의 황새오래걷기 : 엔트리
소프트웨어를 통해 미래를 꿈꾸고 함께 성장합니다.
playentry.org

엔트리봇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했고, UI는 내장 변수들이 다 드러나 허접하기 그지없으며, 두 이미지를 연달아 보여주는 배경의 접합부는 끊겨 있는 게임을 도합 20분 만에 완성하며 나는 오랜만에 짜릿함을 느꼈다. 개발의 짜릿함을 말이다.
그 짜릿함을 나누기 위해 나는 부계에 내가 만든 황새오래걷기와 그 후에 만든 터치로 작동하는 모바일 버전의 링크를 공유했다. 내가 느낀 기분이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플레이를 해 본 많은 사람들은 꽤나 즐거워했다. 나는 이 정도면 값진 수확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허접하더라도 말이다.
완벽주의의 함정
나는 어릴 때 엔트리로 뭔가 멋지고 대단한 것을 만드려다 실패한 적이 많았다. 게임을 만들고 싶어지면 일단 이비스 페인트 X든 파워포인트든 켜서 배경과 캐릭터부터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렇게 비주얼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려다 보니 정작 코딩을 할 땐 힘이 다 빠져서 중간에 포기한 적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김예준이 만든 예준이의 똥 피하기 게임을 보게 되었다. 이 5분 만에 만든 것 같은 허접하고 재미있는 게임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만화는 꼭 A4용지로 제본해서 만든 책에 색연필로 색칠을 해야만 만들 수 있던 걸로 알고 있던 때의 김예준의 마구 휘갈긴 만화를 봤을 때의 충격이었다. 퀄리티와 재미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부담감을 내려놓고 아무거나 만들다 보니 엔트리를 좀 더 즐길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트리는 내 기억에서 멀어지고 파이썬과 C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말이다.
개발의 즐거움
어찌 되었건, 오랜만에 개발과 구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날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엔트리로 이런 헛짓거리들을 하다 보면 여름방학 직후에 있을 학교 축제 부스를 위한 컴퓨터부 조별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리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분명 재미는 있을 것이다.